韓語的導(dǎo)游詞北京
北京是一座有著三千多年歷史的古都,在不同的朝代有著不同的稱謂,大致算起來有二十多個別稱。下面是學(xué)習(xí)啦帶來的韓語的導(dǎo)游詞北京,歡迎欣賞。
韓語導(dǎo)游詞故宮一:
고 궁은 “자금성”이라고 부르던 명, 청 시기의 황궁이다. 고궁은 명나라 영락 4~18년(1406~1420)에 건축, 그후 수차 재건, 개수하였으나 여전히 원래 규모를 보전하였는데 중국 역대 제왕의 궁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천제(天帝)가 거주한다는 ‘자미단(紫薇壇)’에서 앞글자를 따고 역대제왕(帝王)의 궁성은 ‘금지(禁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라는 의미를 더해 붙여진 이름이다.
고궁은 동서가 753m, 남북이 961m의 좌우 대칭식 정사각형 모양의 궁전군으로 주위에 10m 높이의 성벽을 쌓고 50여m너비의 성호를 팠으며, 성벽 네 모퉁이에 각루를 건조하고 남쪽 중간은 오문이다. 고궁은 수십개의 대소 정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방이 도합 9000여칸이 있다. 고궁의 주요 건축물은 크게 외조, 내정 두 부분으로 나뉜다. 외조는 3층 한백옥석 기초위에 건축된 태화,중화,보화, 3대전을 주체로 하는데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고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던 곳이다. 내정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을 주체로 하는데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고 거주하던 곳이며, 그 양측의 동, 서 6궁은 비빈들의 거처이다. 전체 건축은 중축선을 기준으로 서로 대칭되게 배치, 주체가 두드러지고, 계층이 분명하여, 중국 고대 건축예술의 전통과 독특한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고궁은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황궁건축군이다.
1. 오문(午門)
고 궁의 정문으로서 높이 35.6m 이다. 아래는 높고 큰 벽돌 돈대, 돈대위에 승루 5개가 건축되어 있는데 속칭 ‘오봉루’라고 한다. 오문 주 건물은 면적이 9칸, 겹처마 무전식 지붕이며, 양측에 중고정이 설치되어 있다. 매번 조회나 축전 때 북을 두드리고 종을 쳐 위엄을 과시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면 황제가 친히 오문에 나와서 포로들을 접수한다.
2. 동사자(銅獅子)
태 화문 앞 동서 양측에 각각 구리사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는데 동쪽의 것은 수컷이고 서쪽의 것은 암컷이다. 숫사자는 오른발로 수구를 밟고 있는데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며, 암사자는 왼발로 어린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데 자손들의 창성을 상징한다.
3. 동거북(銅龜)
태화전 앞 동서 영단에 각각 선학과 거북을 하나씩 놓아두었는데 등에 뚜껑이 있어 단향을 피우면 연기가 주둥이로 피어 나온다. 선학과 거북은 장수를 비유한다.
7. 건청궁(乾清宮)
내 정의 첫 궁전으로서 명, 청 시기 황제의 침실이며 또한 일상 정무를 처리하던 전당이다. 건청궁 내부를 보면 정중은 보좌, 그 위에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청나라 때에는 강희 황제 이후 재위 황제가 생전에 황위 계승자를 선포하지 않고 내정한 계승자 이름을 써서 밀갑안에 봉해 ᆶ
韓語導(dǎo)游詞北京二:
天壇
천단은 명, 청 시기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교외에 나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은 주나라 때에는 이미 대전으로 되고 한나라, 당나라 (618-907년)때에는 제도로 되었다. 15세기 초 명나라때 천지단을 건조하여 하늘 땅에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 중엽에는 사방 교외에서 각각 하늘, 땅, 해, 달에 제사 지내는 제도를 실행하였다. 이곳은 전문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제공 되었으므로 천단이라 명하였다. 청나라 때 확장하여 현재 중국에서 보존되고 있는 최대 규모의 제단 건축군이다. 천단은 부지 272헥타르,건축배치가 “回”자형을 이루며 2개 단벽에 의해 내단, 외단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외담벽은 총길이가 6,416m, 내단벽은 총길이가 3,292m이다. 내외단벽의 북부는 반원형을 이루며 북부가 높고 남부가 낮은데, 이는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음을 표시하며 또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시한다. 천단의 주요 건축물은 내단 중축선의 남북 양단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사이를 넓은 단계교로 연결하고 있다. 남으로부터 북으로 원구단, 황궁우, 기년전, 환건전 등과 그 밖의 신주축, 재성정, 재궁 등 건물과 고적이 늘어 서 있다.
황궁우
전문 신주를 모셔놓는 사당으로서 속칭 침궁이라고 한다. 높이 19.5m, 밑부분의 직경 15.6m, 목조구조이며, 지붕은 8개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대들보가 없이 두공을 쌓아 올렸으며
頤和園
이화원은 북경시 서북 교외에 위치, 도심에서 약 19km 거리로 청나라 때의 황실 원림과 행궁이었다. 이화원은 본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축되었다. 이화원의 본명은 청이원이며 1764년에 건축되었다.
부지 290ha헥타르, 그 중 수면이 220ha이다. 원내는 궁정구, 전산 전호구, 후산 후호구 3개 경치구로 나뉜다.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000여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 활동을 하며 휴식, 유람하던 곳이다. 1860년에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자 1888년에 자희태후가 해군 경비 500만냥 백은을 유용하여 재건, 10년만에 완공, 이름을 “의화원”으로 고쳤다.
이화원은 북쪽은 만수산을 등지고 남쪽은 곤명호를 안고 있다.
불향각을 주체로 지형과 수면을 충분히 이용하여 가산의 조성으로부터 길의 주향, 전당, 누각의 배치로부터 다리의 조형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전통적 원림 조성 기예를 충분히 계승, 발휘함으로써 상부 상조의 전통적인 원림 예술 효과를 나타내었다.
동궁문 (東宮門)
이화원 정문이다. 문은 삼명이암의 무전식 건축으로, 중간 정문은 “어로”로 황제, 황후가 출입하고 양쪽 문은 왕공, 대신들이 출입하며 태감, 병졸들은 남북 양측 옆문으로 출입하였다. 편액의 “이화원” 세 글자는 광서 황제가 쓴 것이다. 운룡석에 구슬을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용은 황실의 존엄의 상징이며 또한 유지와 칙령의 표징이다.
인수전 (仁壽殿)
궁정구의 주요 건축물의 하나로서 원명은 근정저, 광서 연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 어진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 한다는 뜻이다. 인수전은 청나라 말년 자희태후와 광서 황제가 정무를 보던 대전이며 또한 중국 근대사상 변법유신 운동의 획책지의 하나이다. 1898년 광서 황제가 이 대전에서 개량파 두령 강유위를 소견하고 총리 각국 사무 아문장경상행주로 임명, 이로부터 유신 변법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봉건 보수세력의 반대로 “백일 유신(百日維新)”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낙수당 (樂壽堂)
대형 사합원으로 자희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 화려하다.
대희루(大戲樓)
큰 정원 “덕화원”내에 건조,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최대의 고대 극장으로서 높이 21미터, 상, 중, 하 3층으로 나뉜다. 아래층 천정판 중심에 천장을 내어 위층 무대와 통하게 되어 있으며 중간층 무대는 권양기로 도구와 배경을 위 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게 교묘하게 설치하여 변화 무궁하다.
자희태후 (서태후)(慈禧太后)
자희의 성은 엽혁나라, 청나라 제7대 황제 함풍(1851년~1861년 재위)의 귀비로서 함풍이 죽은 후 “수렴청정 (垂簾聽政)”의 명의로 48년 동안이나 조정의 대권을 독점하였다. 1905년 네델란드 화가 Hubert Vos가 초청에 의해 자희태후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해 그의 연세 70을 넘었다. 화상은 현재 덕화원 내에 보관되어 있다.
장랑 (長廊)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 길이 728미터, 도합 273칸의 화랑으로 중국 회랑 건축 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은 장랑이다. 3109;랑의 채색화 제재는 꽃, 새, 나무, 돌, 산, 물, 인물 등 매우 광범위하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 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546폭의 서호 경치를 그려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그렸다. 금세기 60년대 중국정부는 서호풍경화를 보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특색을 지닌 채색화 1만 4천여폭을 더 그려 장랑을 제일의 화랑으로 되게 하였다.
불향각 (佛香閣)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석기반 위에 건축,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 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날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 1860년 불향각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 후 원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청연방 (석배)(石舫)
석방이라고 한다. 1755년에 건축, 몸체는 거석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총길이 36m, 상하 2층 선실이 있다. “물(백성)은 배(왕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취햐여 청왕조는 반석과 같이 튼튼하여 물이 전복시킬 수 없음을 비유하였다.
17공교 (十七孔橋)
곤명호 동쪽 제방과 호심의 남호도를 연결하는 대형 석교로서 총 길이 150m이다. 교두와 난간 기둥에 도합 544마리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는데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해석
출입하다 出入
봉건보수세력 封建保守勢力
자희태후 慈禧太后
변화무궁하다 變化無窮
장랑 長廊
행궁 行宮
존엄 尊嚴(yán)
실패 失敗
교묘하다 巧妙
덕화원 德和園
석교 石橋
고치다 修改 改變
곤명호 昆明湖
존엄 尊嚴(yán)
백일유신 百日維新
불향각 佛香閣
변법유신 變法維新
라마교 喇嘛教
明十三陵
명 13릉은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약 5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황릉 구역은 장릉이 있는 천수산을 주봉으로 동,서,남,북 사면이 뭇 산들에 둘러싸여 천연적인 대정원을 구성하며 정원 문은 남쪽에 있고, 그 양쪽에 망산과 호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마치 용과 범이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하여 풍수지리설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치고 있다.
명나라 성조 주태로부터 사종 주유검 등에 이르기까지의 13명 황제가 모두 이 군산이 둘러싸고 송백이 무성한 구역내에 매장되었는데 총면적이 약 40평방킬로미터이다.
명 13릉은 영락 7년(1409년)에 장릉을 건축하기 시작해서부터 숭정 17년(1644년)에 사릉을 수축하기까지 200여년을 경과하였다.
당시 전체 능묘구역의 사방 수십킬로미터범위는 금지구역으로서 매우 많은 신비로운 색채를 씌여 놓았었다.
1956년 중국 문화재 고고학자들이 명나라 만력 황제 주익균의 능묘 –정릉을 발굴하고 지하궁전을 발견하였는데 관 이외에도 금, 은, 진주, 보석, 복식, 옥기 등 3,000여점의 보물이 출토되면서 정릉의 비밀이 밝혀졌다.
1959년 10월에 정릉 박물관이 설립되었으며, 이때부터 명 13릉은 북경지역의 유명한 관광명소로 되었다.
해석
경과하다 經(jīng)過
출토되다 出土
순장품 隨葬品
무리를 지다 成群
보물 寶物
설립되다 設(shè)立
관광명소 名勝古跡
발굴하다 挖掘